‘잘 키운 딸 하나’라는 일일드라마가 있다.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필자도 가끔 보곤 하는데,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대를 이어 ‘황소간장’이라는 전통 간장을 만들어오고 있는 가족기업의 회장이 연로해 후계자를 정해야 하는데, 남자만 가업을 이을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런데 아들은 먼저 죽었고 그 뒤 무슨 이유로 며느리를 쫓아냈는데 유복자로 손녀 장하나가 태어났다.
결국 며느리는 딸을 아들로 키워 가업을 잇게 하려고 하지만 손자가 아니라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회장이 쫓아낸다.
그 뒤 황소간장은 문을 닫을 위기에 몰리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손자, 아니 손녀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탤런트 박한별 씨가 ‘잘 키운 딸’ 장하나 역할을 하는데, 남장 역할을 한 초반부를 필자가 못 봐서 그런지 몰라도 영 설득력이 없다.
남자로 오해할 수 있는 외모라고 하기에는 주인공이 너무 단아한 미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헤어스타일이나 복장스타일, 화장에 따라 남자로 보이는가 여자로 보이는가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어떻게 해도 박한별 씨를 남자로 보이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드라마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정말 남자인지 여자인지 헛갈리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가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므로 ‘이해’는 한다.

사실 드라마 주인공 설정처럼 남녀 성별이 애매해 보이는 외모인 사람은 좀 고민이 될 것이다.
사실 남자는 더 남성스럽게 보이고 여자는 더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그래야 이성에게 더 호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상형이 다를 수 있어 보이시한 여성이 좋다는 남성도 있고 예쁜 남자가 좋다는 여성도 있지만 주류는 상식적인 취향일 것이다.

남자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성들은 좀 더 여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들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에게 희소식이 될 만한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돼 화제다.
이 연구결과가 맞다면 이제 여성들은 화장이나 제모, 패션 등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 대신
‘페로몬 향수’만 한 번 뿌려주면 ‘여성성’을 8%나 끌어올릴 수 있다. 물론 남성들도 남성 페로몬 향수로 비슷한 수준으로 ‘남성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남녀 판단에 8% 정도 영향 미쳐

학술지 ‘커런트 바이롤로지’ 5월 19일자(온라인으로 미래 공개됨)에는 그동안 성페로몬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여겨졌던 두 물질인 안드로스타디에논(androstadienone)과 에스트라테트라에놀(estratetraenol)이 진짜 성페로모일 가능성이 높음을 입증한 행동실험결과가 소개됐다. 남성의 정액과 겨드랑이 털, 겨드랑이 피부 등에서 발견된 안드로스타디에논은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페로몬, 여성의 오줌에서 발견한 에스트라테트라에놀은 여성페르몬 후보물질이었다.
남성페로몬으로 추정되는 안드로스타디에논(왼쪽)과 여성페로몬으로 여겨지는 에스트라테트라에놀(오른쪽)의 분자구조. 둘 다 스테로이드 화합물이다. 최근 이 두 물질이 정말 성페로몬임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중국과학원 연구자들은 인체를 15개의 점으로 표시한 뒤 점의 움직임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점-빛 보행자(point-light walkers)’라는 방법을 이용했다.
즉 점 12개는 주요 관절에, 나머지 3개는 골반과 가슴, 머리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점들의 상대적인 움직임만 봐도 사람의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천천히 걷고 있는지 빨리 걷고 있는지 남성의 걸음걸이인지 여성의 걸음걸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사전 조사를 통해 걸음걸이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7단계로 나눴다.
예를 들어 가장 여성스런 걸음일 경우 응답자의 대다수가 점의 움직임을 보고 여성의 걸음이라고 답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네 부류의 피험자를 확보했다. 즉 이성애를 지닌 남성 24명, 이성애 여성 24명, 동성애 남성 24명, 양성애 및 동성애 여성 24명이다.
피험자들은 모니터를 보고 7단계 가운데 임의의 나오는 걸음걸이를 보고 남성인지 여성인지 판단하면 된다. 이때 실내에는 클로브향이 뿌려져 있는데, 실은 세 가지 경우다.
즉 클로브향만 나는 경우, 클로브에 안드로스타디에논이 섞여 있는 경우, 클로브에 에스트라테트라에놀이 섞여 있는 경우다.
피험자들은 이 세 가지 향을 구분할 수 없었는데, 무의식의 수준에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페로몬의 경우 냄새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측정결과 안드로스타디에논이 섞여 있는 향을 맡은 이성애 여성들과 동성애 남성들은 점-빛 보행자를 보고 남성이라고 판단하는 비율이 약간 늘어났다.
특히 약간 애매한 중간 단계들에서 이런 변화가 컸다. 한편 이성애 남성과 양성애 및 동성애 여성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다.

페로몬이 대상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영향을 미치는 실험에 이용된 ‘점-빛 보행자’ 실험. 주요 관절 12곳과 신체 중심부 3곳을 나타내는 점의 움직임을 통해 보행자의 걸음걸이를 유추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점-빛 보행자의 남녀 정도를 7단계로 나눴다(위). 아래 펼쳐놓은 동영상 프레임은 전형적인 여성(위)과 남성(아래) 걸음걸이다.
한편 에스트라테트라에놀이 섞여 있는 향의 경우 이성애 남성들에서 점-빛 보행자를 보고 여성이라고 판단하는 비율이 약간 늘어났다. 역시 약간 애매한 중간 단계들에서 이런 변화가 컸다.
한편 이성애 여성과 동성애 남성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양성애 및 동성애 여성에서도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즉 이성의 페로몬을 맡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성의 성별을 더 강하게 느낀다는 연구결과로 그 정도는 8% 수준에 이른다.
한편 성적취향이 반대가 돼 동성을 좋아하는 남성의 경우는 이성애 여성과 같은 패턴을 보인다.
즉 동성애는 후천적으로 획득한 취향이 아니라 뇌에서 생리적으로 결정된 선천적 측면이 강함을 시사하는 결과다.
다만 양성애 및 동성애 여성에서는 두 페로몬 모두 별 효과가 없었다.

한편 논문에서 저자들은 실험에 적용된 페로몬의 농도가 실제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농도보다 훨씬 높다고 언급했다.
일상생활에서는 페로몬의 영향이 이정도로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향수에 이런 페로몬을 넣을 경우 실험에서 관찰한 수준의 효과를 볼지도 모른다.
평소 외모에서 여성성이 부족해보여 고민이었던 여성이 페로몬 향수 덕분에 ‘잘 키운 딸’로 거듭나는 일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이다.